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궁과 월지 (문단 편집) ==== 신라시대 당시의 구조와 건축물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안압지 - 중전.pn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안압지 - 정전.jpg|width=100%]]}}}|| ||<-2> {{{#fbe673 '''한 누리꾼이 복원한 '동궁과 월지'의 중전(中殿)과 정전(正殿)[*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nn0909&logNo=220698029496&targetKeyword=&targetRecommendationCode=1|사진 출처.]]]'''}}} || 동궁에서 [[호수]]와 가장 인접한 곳에 임해전(臨海殿)을 세웠고, 여기서는 호수를 바라보며 [[잔치|연회]]를 즐기는 장소로 쓰였다. 신라가 멸망하기 직전인 931년 [[왕건]]이 [[서라벌]]을 방문했을 때 [[경순왕]]이 왕건을 임해전에서 접대하기도 했다. 특이점으로 임해전의 건물 구조는 [[탑]]이 없는 것을 제외하면 전형적인 [[절(불교)|사찰]] 가람 [[https://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5474|양식]]이다. 실제로 호수 안에서 [[불상]]과 [[불교]] 관련 유물이 좀 나오기도 했는데, [[신라]]는 왕실과 석가모니 가문을 동일시할 정도로 불교와 왕실이 밀착해 있었으므로 왕실 건축도 영향을 받은 듯하다. 동궁에는 임해전을 비롯해 건물 27동의 건물이 확인되고 있는데, 임해전, 사정부, 소년감전, 예궁전, 동궁아관, 동궁아, 어룡성, 세택, 급장전, 월지전, 승방전, 포전, 월지악전, 용왕전 등이 있었다. 현재는 건물 3채만 복원했고, 나머지는 울타리를 쳐놓고 주춧돌만 보존한다. 동궁과 월지에 가 보면 입장 후 호수까지 가는 길에 건물 터들을 볼 수 있다. 궁궐의 바닥은 [[경주 월지 보상화무늬 전]]과 같은 [[전돌]]을 [[보도블럭]]처럼 깔아서 포장했다. 동궁의 동쪽에 있는 [[호수]] 월지(안압지)는 별궁인 동궁에 붙어 있고 [[신라]] 왕궁 안쪽의 친수 구역으로, 거대한 인공 [[연못]]에 조경을 해놓았다. 임해전(臨海殿) 전각의 이름에서 보듯 [[호수]]는 [[바다]]를 형상화해서 만들었다. 좁은 호수를 넓어 보이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고려하였다. 서쪽과 동쪽의 높이를 다르게 하고, 동쪽의 해안선을 구불구불하게 만들어 어디에 서서 봐도 호수 전체가 보이지 않도록 했다. [[신라]] 때부터 [[연꽃]]을 식재했지만 연꽃이 무제한으로 번식하여 수면을 뒤덮어 좁아 보이게 됨을 방지하고자 물 안쪽에 우물 정(井)자형으로 귀틀을 만들고 그 안에만 연꽃을 심었다. 하지만 현대 복원 과정에서 이를 고려하지 않아 호수 여기저기에 연꽃이 만발해졌다. 월지에는 가장자리가 곡선과 직선이 섞인 [[연못]]이 있고, 연못 안에 크기가 서로 다른 섬 3개를 만들어[* 섬 3개 때문에 조선시대에 나온 [[안정복]]이 지은 [[동사강목]]에서는 '상무산십이봉' 즉, 무산 십이봉을 본떠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1999년 이전까지 이러한 구절을 인용해서 신선사상 등을 표현한 것이라는 [[https://www.kb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901679|주장]]도 있었다. 정작 동사강목보다 훨씬 [[신라]]시대와 가까운 자료, 즉 [[삼국사기]]나 [[일본서기]] 등에서는 월지를 두고 '귀한 [[식물]], [[동물]]을 풀어놓았고 관상용으로 즐겼다는 것' 이외의 별다른 묘사를 하지 않았다. '무산 십이봉'이라는 개념이 나오기 전에 월지를 만들었음을 감안하면, 안정복이 조선시대 사람이니 당연히 당시 사고방식으로 잘못 판단한 것이다.] 섬 안에는 각종 진귀한 [[식물]]과 [[동물]]들을 풀어 놓았다고 한다. 모두가 여기에서 키우던 동물인지 그냥 고기를 먹고 뼈다귀를 호수에 내던져 버렸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호수 속을 조사했을 때 [[소]], [[말(동물)|말]], [[돼지]], [[개]], [[노루]], [[산양]], [[사슴]], [[멧돼지]], [[꿩]], [[오리]], [[닭]], [[거위]], [[기러기]] 등의 뼈가 출토되었다. [[섬]]의 곡선이 교묘하게 처리되어 절대 한 곳에서는 그 전체 모습이 다 보이지 않음이 특징이다 보니 별 달리 지루한 것이 없다. 월지 등장 이후 이런 자연스러운 굴곡이 있는 [[연못]] 형상이 한국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 [[일본]] [[나라시|나라]] 쪽 연못에서도 유사점이 보이는데, 아마 이걸 본 일본 관료들이 일본에 있는 [[백제]]계 조경가들을 이용해서 만들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통일전쟁 직후에 만든 곳이라 [[고구려]]와 백제계 장인이 참여했을 것이라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1970년대 발굴을 위해 호수의 물을 빼자 거대한 석축이 드러났는데 큰 돌을 벽돌 모양으로 가공해 가지런히 쌓고 석축 주위에 보호석을 깐 것은 고구려의 [[산성]] 양식과 유사하고, 출수구에서는 궁남지와 같은 연못 조경을 발달시켜온 백제 양식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전 황룡사 목탑 건축에도 백제 장인 아비지가 참여했음을 보면 구삼국 출신 장인들이 모두 참여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호수]]의 물은 북동쪽에 있는 북천의 물을 인공 수로로 끌어오는데 [[신라]]시대에 만든 [[https://science.ytn.co.kr/program/view.php?mcd=1221&key=201711130923277458|입수구]] 장치가 지금도 남아 있다. 여기에도 여러 과학적 장치가 있는데, 물이 호수로 떨어지기 전에 거북이 등껍질을 음각한 듯한 두 개의 수조를 지나게 되어 있어 북천 물에 섞여온 자갈과 흙들은 이 수조에서 거르고, 입수구의 물이 떨어지는 곳에는 판판한 돌을 깔아서 침식과 흙탕물이 되지 않도록 했다. 물이 떨어져 흐르는 곳 바로 앞에 작은 인공섬을 만들어 물살을 느리게 하고 자연스럽게 물이 흐르도록 했다. 서남쪽에는 호수 물이 빠져나가는 배수구가 있는데 나무 마개 3개로 호수의 높이를 조절했다. 월지의 형태가 [[동아시아]]의 [[지도]]를 표현했다는 [[https://arca.live/b/city/72068981|견해]]도 있다. 실제로 가서 보면 잘 알기 어렵지만 공중에서 바라보면 관람자가 서는 곳(서쪽) 기준에서 봤을 때 호수의 윤곽선이 상당히 중국 동해안부터 [[한반도]]로 이어지는 해안선과 유사하다. 중국은 대충 큰 땅덩어리 정도로 처리했지만 한반도 부분 해안선은 상당히 유사하다. 이에 따르면 위에서 말한 섬 3개는 [[제주도]], [[일본]] 등을 표현한 것이라고. 지도 모양으로 만든 게 맞다면 세계 최초의 입체 지도라고 하며, 동아시아 전체를 표현한 지도 중 실물이 남은 가장 오래된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보다도 600년 이상 오래된 셈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월지관에도 월지 해안선 지도설 이야기를 실어놓았다. 물론 [[한반도 지형]]처럼 우연히 닮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건 인공 [[호수]]라. 다만 뚜렷한 기록이나 물증이 없어 가설로만 남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